일본서 우유 배달로 모은 종잣돈으로 화공제품 사업
1967년 롯데제과로 시작, 재계 5위 롯데그룹 일궈내
일본서 사업하며 끝까지 대한민국 국적 유지
복잡한 가족사, 후계 구도 정리 못하며 말년은 우울

[포쓰저널=서영길 기자] 지난해 1월 별세한 롯데 창업주인 고(故) 상전(象殿) 신격호(1921.11.3~2020.1.19) 롯데 명예회장이 3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롯데그룹은 신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흉상을 제작하고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상전 신격호 기념관’을 여는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인간 신격호에 초점을 맞춘 회고록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도 내놓았다.
회고록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쩌렁쩌렁하게 호령하시던 모습도, 파안대소하며 박수를 쳐주시던 모습도,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시며 격려해 주시던 모습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추억이 됐다. 그래서 그 모습이 점점 더 그리워진다”라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신 명예회장은 이병철 삼성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등과 함께 국내 굴지의 기업을 일궈낸 창업 1세대를 대표하는 기업인이다. 1967년 롯데제과로 시작해 유통, 화학으로 사업을 넓히며 100조 원의 자산을 보유한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만들었다.

◇ 열정·도전으로 이룬 꿈
1921년 10월 4일 경남 울주의 작은 마을의 빈농에서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울산농업실수학교를 졸업하고 보다 큰 세상에서 꿈을 펼쳐 보고자 1941년 혈혈단신으로 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에서 우유배달, 트럭기사 조수 등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와세다고등공학교 야간부 화공과에 적을 두고 학업을 이어갔다.
1944년 성실함을 인정받아 투자를 받아내며 화공제품을 제작하는 작은 공장을 세워 기업 경영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어렵게 일군 공장과 제품이 폭격으로 두 번이나 완전히 소실되는 시련을 겪는다.
이후 신 명예회장은 고생 끝에 세숫비누와 포마드 크림 등의 사업에서 성공, 1948년 현재 롯데그룹의 모체인 (주)롯데를 설립한다. ‘껌'으로 사업을 시작한 롯데는 초콜릿, 캔디 등으로 분야를 확장하며 불과 20여 년 만에 일본 굴지의 종합제과업체로 우뚝 선다.
1965년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자 신 명예회장은 고국 대한민국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1인당 GDP가 약 300달러에 불과했던 조국의 현실을 보며 고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한국 정부로부터 고국으로의 진출 제안도 받았던 터였다.
신 명예회장이 정부에게 최초 받은 제안은 근대화의 상징인 ‘제철업’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계획을 변경해 공공 주도로 제철업을 추진하기로 하며 계획이 무산됐다. 신 명예회장은 거액을 들여 준비한 제철 자료를 관련 사업을 준비중이던 포항제철 박태준 회장에게 조건 없이 제공하기도 했다.

신 명예회장은 계획을 변경해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 국내에 첫 진출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유서깊은 서울 중구 반도호텔 자리에 새로운 호텔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웠지만 신 명예회장은 고민 끝에 세계적 호텔 건립 이상의 목표를 세운다. 300~400실 규모면 일류 호텔 소리를 듣던 1970년대 초에 40층, 1000실 규모의 호텔에 더해 백화점과 오피스타운까지 동시에 건설하는 복합개발을 구상한 것이다.
서울 소공동 롯데타운, 잠실 롯데월드, 롯데월드타워는 ‘가족 모두가 함께 즐겁게 지낼 행복한 공간’을 꿈꾼 신 명예회장 특유의 복합개발 방식과 규모를 잘 보여 준다.

신 명예회장의 이같은 복합개발 방식은 잠실 롯데월드에서 그 정점을 이뤄 테마파크와 호텔, 백화점, 쇼핑몰의 복합개발이라는 시도로 이어졌다. 나아가 신 명예회장은 많은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생의 숙원인 123층 짜리 ‘롯데월드타워’를 만들어냈다.
당시 롯데백화점 잠실점 부지는 황량한 모래벌판과 물웅덩이, 비가 오면 한강 범람을 걱정해야 하는 유수지였다. 이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 대해 신 명예회장은 “상권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상품과 훌륭한 서비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며 “잠실 일대는 곧 명동만큼 번화한 곳이 될 것”이라고 확언했고 이는 현실이 됐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눈과 발로 현장을 확인할 것을 자주 당부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현장의 진실한 모습과 니즈를 파악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한국과 일본을 한 달씩 오가며 셔틀 경영활동을 펼쳤던 신 명예회장은 한국에 오면 롯데백화점이나 롯데마트, 롯데호텔의 현장에 불쑥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매장을 둘러보며 고객에 대한 서비스는 친절한지, 매장 청결 상태가 우수한지, 안전 점검은 잘 되고 있는지 등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현장 경영을 몸소 실천했다.

◇ 대한민국 기업인....우울한 말년
가족을 떠나 일본에서 사업을 꾸려 나간 신격호 회장은 고국 출신의 스포츠인, 문화인 등을 지원하고 교류함으로써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조치훈 9단의 형인 조상연 7단은 “조치훈 9단이 일본에서 명인 타이틀을 획득하고 한국 정부에서 주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으러 갈 때 신 명예회장이 일등석 비행기표를 끊어 주며 한국까지 동행했다”고 일화를 밝혔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 ‘내가 데려왔습니다’라며 인터뷰를 할 법도 한데 말없이 가버리셨다”고 했다.
고향에 대한 애정도 변치 않았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1971년부터 2015년까지 45년간 매년 고향 울산 둔기리 마을에서 잔치를 열고 어르신들을 극진히 모신 일화는 유명하다.
신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성공한 한국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귀화하지 않고 끝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했다.
성공한 기업가였지만 세번의 결혼에 따른 복잡한 가족사와 후계 구도를 위한 지분 정리를 미루며 말년은 불우했다.
신동빈, 신동주 두 아들의 경영권 분쟁에 휩쌓여 불명예스럽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치매 진단을 받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성년후견인 도움을 받아야 했다.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징역형의 집행이 정지된 기간에 끝내 두 아들의 화해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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