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헌 변호사(법무법인 천고 대표)

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사실관계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당사자는 승소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에 재판이 쉽게 종결되지 않는다. 승패에 대한 전망도 쉽지 않다.

반면에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면 당사자는 승패에 대한 전망을 보다 더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정확한 평가는 당사자가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을 방지해 준다. 그래서 합의 등으로 사건이 종결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소송사건을 처리해 오면서 내가 늘 아쉽게 느끼는 것이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증거자료를 스스로 확보해 놓지 않으면 소송과정에서 상대방으로부터 중요 자료를 제공받는 것이 쉽지 않다. 증인신문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제약이 있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증인에게 많은 질문을 하기가 여의치 않다. 사실관계가 명확해지지 않은 채 재판이 진행되므로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 지 확실치 않다. 따라서 승패에 대한 전망도 쉽지 않다. 

한편 미국소송의 경우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제도가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데포지션(deposition)이다. 데포지션(deposition)을 흔히 '증언녹취'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한국에는 없는 제도이다.

증언녹취는 미국소송에서 변호사들이 재판에 사용할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 증인으로부터 증언을 듣고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절차이다. 이것은 법적 절차이기는 하지만 판사가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들이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절차이다.

증언녹취를 하는 경우 각 질문과 증인의 대답은 속기사에 의해 기록되고 영상 녹화가 이루어 진다. 이 기록은 문서의 형태로 만들어져서 쌍방 변호사들에게 보내진다. 증언녹취를 하는 경우 증인은 선서를 하게 되고, 답변의 내용이 거짓일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증언녹취를 통해서 쌍방 변호사들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증인에게 많은 질문을 할 수 있고 쌍방 변호사가 사건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증언녹취는 변호사가 상대방 및 자신들 주장의 강점과 약점이 각각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증언녹취한 내용과 법정에서의 진술 내용이 차이가 있을 경우 증언녹취한 내용이 재판절차에서 사용된다.

시간과 비용이 들기는 하지만 증언녹취절차를 통해서 충분하게 질문하고 답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진실에 가깝게 사실관계가 정리가 되게 된다.  이렇게 정리가 된 사실관계를 가지고 변호사들은 사건의 승패에 대해서 전망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재판을 계속 할 것인지 아니면 합의를 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소송의 대부분이 합의로 종결된다. 이것은 증언녹취와 같은 제도를 통해서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증언녹취는 사실관계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제도이다.  이런 제도를 우리도 가지고 있으면 분쟁의 신속한 종결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분쟁이 쉽게 종결되지 않는 한국의 현실에서 증언녹취제도의 도입을 고려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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