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신춘호 농심 회장.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참 어렵게 꾸려왔다.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고 한여름 가마솥 옆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내 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같다.

배가 고파 고통받던 시절, 내가 하는 라면사업이 국가적인 과제 해결에 미력이나마 보탰다는 자부심을 가져본다. 산업화 과정의 대열에서 우리 농심도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다. 이제는 세계시장을 무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다그치고 있다.

우리의 농심가족들이 나는 정말 자랑스럽다. 쌓아온 소중한 경험과 힘을,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순수하고 정직한 농부의 마음으로, 식품에 대한 사명감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계로 나아가자” (고 신춘호 농심 회장 저서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중)

[포쓰저널] 농심 창업주인 율촌(栗村) 신춘호 회장이 27일 오전 3시 38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신 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부친 신진수 공과 모친 김필순 여사의 5남 5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롯데그룹 창업주인 고 신격호 회장의 둘째 동생으로 신준호 푸르밀 회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이 동생이다.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부회장), 신동윤(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아모레퍼시픽 서경배회장 부인) 등 3남 2녀를 뒀다.

신춘호 회장은 1958년 동아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형인 고 신격호 명예 회장을 도와 일본롯데에서 제과사업을 시작하다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했다.

2차 세계대전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국내에서는 삼양라면이 처음 출시될 때다.

당시 신춘호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따라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형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라면사업을 반대, 도와주지 않자 수중에 있던 당시 돈 500만원과 명동 사채 시장을 통해 구한 자금으로 1965년 힘들게 (주)롯데공업을 창업했다. '롯데라면'을 내놓고 1966년 현재 농심 사옥이 있는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라면 공장을 세웠다.

1970년 당시로선 귀한 소고기를 내세운 '롯데 소고기 라면'을 히트시킨데 이어 1971년에는 '롯데 새우깡'으로 스낵사업에도 진출했다. 1975년엔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CF를 통해 '농심라면'을 선보이며 삼양라면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롯데제과와 사업이 겹치면서 신격호 명예회장은 롯데라는 상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신춘호 회장은 결국 1978년 (주)농심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이후 형제는 의절했다. 지난해 신 명예회장의 장례식장에도 쌍둥이 아들인 신동원 농심 부회장과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만 참석했다.

신춘호 회장은 너구리(1982년), 안성탕면(1983년), 짜파게티(1984년), 신라면(1986년) 등 라면과 국내 최초의 스낵인 새우깡(1971)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농심을 국내 대표 식품회사로 키워냈다. 1992년 10월 농심그룹의 총수가 됐다.

신춘호 회장의 브랜드 철학은 확고하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해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적인 맛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라면쟁이, 스낵쟁이라 부르며 직원들에게도 장인 정신을 주문하곤 했다.

신춘호 회장은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뒀다. 당시 라면산업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면 제품 개발이 수월했겠지만 농심 만의 특징을 담아낼 수도,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71년 새우깡 개발 당시에도 “맨땅에서 시작하자니 우리 기술진이 힘들겠지만, 우리 손으로 개발한 기술은 고스란히 우리의 지적재산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새우깡은 4.5톤 트럭 80여대 물량의 밀가루를 사용하면서 개발해 냈다.

안성공장 설립때에도 신춘호 회장의 고집은 여실히 드러난다. 신춘호 회장은 국물 맛에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선진국의 관련 제조설비를 검토하돼 한국적인 맛을 구현할 수 있도록 턴키 방식의 일괄 도입을 반대했다. 선진 설비지만 서양인에게 적합하도록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농심이 축적해 온 노하우가 잘 구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주문한 것이다.

신춘호 회장은 '작명의 달인'으로도 이름 높다. 1986년 출시된 공전의 히트작 '신(辛) 라면'은 본인의 성을 따서 붙였다.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일본 사누끼 우동에서 비롯된 '너구리',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농심의 역대 히트 작품에는 모두 신춘호 회장의 천재성이 반영됐다. 신 회장의 마지막 작품은 원재료를 강조해 지난해 10월 출시된 '옥수수깡'이다.

신춘호 회장이 브랜드의 중요성에 눈을 뜬 것은 1970년 ‘짜장면’의 실패에서였다. 유명 조리장을 초빙해 요리법을 배우고 7개월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내놓은 국내 최초 짜장라면 ‘짜장면’은 출시 초기 소위 대박이 났다. 하지만 비슷한 이름으로 급조된 미투제품의 낮은 품질에 불만을 느낀 소비자들은 짜장라면 전체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결국 농심의 짜장면도 사라지게 됐다. 당시 신 회장은 “제품의 품질도 중요하지만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로 확실한 차별화 전략이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신 회장의 역작인 신라면은 출시 당시에는 파격적인 이름이었다. 당시 브랜드는 대부분 회사명이 중심으로 돼 있었고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다. 하지만 신춘호 회장이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라면은 1991년부터 30년 넘게 라면 시장 1위를 차치하며 국민라면으로 사랑받고 있다. 대표 'K-푸드'로 100여 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1971년 라면 수출을 시작한 농심은 지난해 사상 최대인 9억9000만 달러의 해외 매출을 기록했다. 지난해 2조6000억원대 매출중 40% 이상이 해외에서 나왔다.

신춘호 회장은 해외진출 초기부터 신라면의 세계화를 꿈꿨다. 한국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는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제품인데 나라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 고급 이미지도 입혔다.

실제로 신라면은 미국시장에서 일본라면보다 대부분 3~4배 비싸다. 월마트 등 미국 주요 유통채널에서는 물론, 주요 정부시설에 라면 최초로 입점돼 판매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한국 특유의 얼큰한 맛으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농심이 2011년 출시한 프리미엄라면 신라면블랙은 출시 초기 규제와 생산중단의 역경을 딛고, 지난해 뉴욕타임즈가 꼽은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올랐다.

신춘호 회장은 2018년 중국의 인민일보가 신라면을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명품’으로 선정했을 때, 뉴욕타임즈가 신라면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했을 때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다고 전해진다.

신춘호 회장의 라면은 배고픔을 덜어주는 음식에서 개인의 기호가 반영된 간편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농심 지배구조는 고인의 장남인 신동원(63) 부회장 중심으로 승계가 마무리된 상태다. 농심그룹 지주사인 농심홀딩스는 29일 정기주총에서 신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을 상정하지 않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낙양씨(89)와 신현주(65)· 동원(63)·동윤(63)·동익(60)·윤경(53)씨 등 3남 2녀가 있다.

장례식장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30일 오전 5시다.

故 신춘호 회장 어록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따라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한다. 이런 제품이라면 우리의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범국가적인 혼분식 장려운동도 있으니 사업전망도 밝다” (1965년 창업당시 라면시장에 진출하며)

“스스로 서야 멀리 갈 수 있다.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라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 (창업초기 우리 손으로 라면을 만들자며)

“저의 성(姓)을 이용해 라면 팔아보자는 게 아닙니다. 매우니까 간결하게 ‘매울 辛’으로 하자는 것입니다”(1986년 신라면을 출시하며)

“농심 브랜드를 그대로 해외에 가져간다. 얼큰한 맛을 순화시키지도 말고 포장디자인도 바꾸지 말자. 최고의 품질인 만큼 프리미엄의 이미지를 확보하자. 한국의 맛을 온전히 세계에 전하는 것이다” (1990년대 해외 수출 본격화에 앞서)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2010년 조회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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