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헌 법무법인 천고 대표변호사

T금속의 소방관련 용품 제작 및 미국 수출은 미국계 E컨설팅 기업과의 인연으로 시작됐다. 회사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해외 시장을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하지만 중소기업으로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대기업처럼 해외시장을 개척할 전문 인력도 부족했고, 경험도 부족했다. 

그러던 차에 E컨설팅이 해외시장 개척을 적극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T금속은 E컨설팅의 말만 믿고 덜컥 에이전트 계약을 체결했다. 일단 손해 볼 것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계약의 주 내용이 E컨설팅의 소개로 수출 계약이 성사될 경우 커미션을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E컨설팅이 계약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T금속에서 지출될 돈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이전트 계약 체결이후 일도 술술 풀리는 듯 했다. 계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소방용품 제작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였다. T금속이 거푸집을 만드는데 절반의 비용을 투자해가면서 수출 계약을 맺었지만, 충분한 생산 물량을 주문받지 못했다. 

T금속은 E컨설팅이 적극적으로 중재해 주길 기대했지만, E컨설팅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래저래 E컨설팅에 대한 실망감이 누적되고 있던 차에 E컨설팅은 새로운 바이어를 소개해주겠다며 한국으로 왔다. E컨설팅 관계자와 함께 미팅에 나온 바이어는 미국의 W기업이었다. 

실망감이 배로 증가했다. W기업은 이미 T금속이 잘 알고 있는 기업이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고, E컨설팅이 아니더라도 수출 계약을 맺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새로운 수출 계약을 성사 시킬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은 접고, E컨설팅에 사실 관계를 명확히 알렸다. 이미 W기업과는 오래전부터 거래를 해오던 사이이기 때문에 커미션을 요구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로만 끝났다. E컨설팅은 W기업과 계약이 체결된 뒤 커미션을 요구했다. T금속은 말도 안되는 요구라며 펄쩍 뛰었지만 E컨설팅은 ‘계약조건’을 다시 들이밀고 미국에서 T금속을 상대로 소를 제기했다. 계약서를 다시 살펴보니 E컨설팅의 말이 맞았다. 만약 소송에서 T금속이 패소해 미국 수출품이 압류라도 된다면 큰 낭패를 볼 처지에 처했다. 

T금속은 부랴부랴 소송서류와 E컨설팅과의 계약서를 들고 로펌을 방문했다. E컨설팅과 맺은 계약에 의하면 T금속은 다음과 같은 의무를 부담했다.

●     T금속은 10년동안 E컨설팅의 거래처에게 판매한 총매출액의 10%를 커미션을 지급한다. 
●     T금속은 E컨설팅의 거래처와는 직접 업무 처리를 하면 안되고 반드시 E컨설팅이 업무처리를 해야 한다. 
●     T금속이 E컨설팅의 계약상 권리를 침해하면 모든 손해를 다 배상해야 한다.

T금속의 영업이익이 10%가 되지 않는데 10%를 커미션을 지급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조건이었다. E컨설팅의 거래처라는 것도 명확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그리고 계약조건이 E컨설팅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포괄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제계약 경험이 없는 A사가 해외시장을 개척하여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계약 내용을 자세히 보지 않고 계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그 계약으로 인해서 수출거래에 새로운 걸림돌이 생기게 된 것이었다. 

지난 번 소방용품 미국 수출 건처럼 이번에도 T금속은 한발 물러서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 실수로 불리한 계약을 체결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두 번 계속 물러서다보면 국제분쟁이 발생할 때 마다 손실을 감내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 내가 볼 때 T금속이 국제소송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내는 것이 기업의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앞으로 T금속이 해외 기업과 거래 할 때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학습’을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고심 끝에 T금속은 이번만은 물러설 수 없다고 마음을 굳히고 적극적으로 응소하기로 하였다. T금속의 요청에 따라 나는 미국에서 소송을 대리할 미국 변호사를 선임하였고 소송전략을 협의하였다. 

E컨설팅은 미국에서 소송을 하게 되면 분명한 계약서가 있는데다 T금속의 연간매출액이 수천억원에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E컨설팅은 배심원들의 동정심을 사서 충분히 승소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런데 데포지션을 진행하고 디스커버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E컨설팅측 담당자들의 진술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사실관계가 재구성되었을 때 E컨설팅측 변호사는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백기를 들었다. 이 사건은 합의로 종결되었는데 사실상 승소에 해당하는 결과였다. 

데포지션과 디스커버리를 진행하면서 많은 소송비용이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번 소송을 적극적으로 진행한 이유는 국내 기업들에게 만연한 ‘국제 소송 울렁증’을 해소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국제소송? 한번 해보면 ‘그것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해보기 전에는 두려움에 한 발짝도 나가려 하지 않는다. 

국제소송을 국내 기업이 적극적으로 제기해 이겨본 경험이 공유될 때 우리기업들이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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