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구자경 명예회장./사진=LG 

[포쓰저널=염지은기자] 고(故)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LG 명예회장(1925.4.24.~2019.12.14.)은 시련 많은 현대사 속에서도 기업경영의 정도를 잃지 않고 앞선 생각, 과감한 결단으로 우리 경제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큰 기업인이었다.

원칙 중심의 합리적 경영으로 LG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키고 명예롭게 은퇴, 재계의 귀감이 되고 있다.  

LG그룹 창업 초기이던 1950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20년간 생산현장을 지킨 구자경 명예회장은 부친인 연암 구인회 창업주가 62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45세가 되던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회장 재임 25년간 LG의 ‘도전과 혁신’을 주도하며 지금과 같은 글로벌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했고,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그는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일념으로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분야의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과 우리나라의 산업 고도화를 이끌었다.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뤘다.

구 명예회장은 과감하고 파격적인 경영 혁신을 추진해 자율경영체제 확립, 고객가치 경영 도입, 민간기업 최초의 기업공개,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 현지공장 설립 등 기업 경영의 선진화를 주도한 '혁신가'이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자로의 업적은 물론 은퇴 후의 삶까지 재계의 귀감으로 존경을 받아 왔다.

70세이던 1995년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임종을 맞을 때까지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보내며 인재 양성을 위한 공익활동에 헌신했다.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명예회장.
구인회 창업회장 흉상 앞에 선 구자경 명예회장.

◆ 교사의 꿈 접고 사업가로..LG 창업과 성장 주도

고인은 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교사로 근무 중이던 1947년 부친이 시작한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의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이 날로 번창해 일손이 모자라자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예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부름에 1950년 교편을 놓고 본격적으로 기업인으로의 길을 걷게 됐다.

구 명예회장은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현장경험을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도 했다.

밤에는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아침 5시 반이면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하는 등 현장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구 명예회장은 설비를 점검하고 기계를 발주하는 등 공장 신·증축을 직접 해 내면서 화학·기계·전기 등에 관해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게 됐는데 이는 후에 화학과 전자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때 축적된 금형 역량을 바탕으로 라디오, 선풍기, 모터 등 당시로서는 높은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전자제품의 금형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구 명예회장은 국내최초의 플라스틱 생활용품, 비닐제품, 라디오, 선풍기, TV 등 새로운 화학과 전자 제품의 탄생과 호흡을 늘 같이 해 왔다.

구 명예회장이 여느 2세 경영인과는 달리 창업과 성장을 함께 주도한 1.5세대 경영인으로 평가 받는 이유도 그가 부친의 창업 초기부터 합류해 20년간 생산현장을 도맡으며 사업을 정착시켜 공고히 성장시키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 ‘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화학·전자 산업강국 기틀 마련

구자경 명예회장은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으로 기술 연구개발에 승부를 걸어 우리나라 화학·전자 산업의 중흥을 이끈 경영자였다.

구 명예회장은 늘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외쳐댈 때에도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그치게 된다며 ‘강토소국 기술대국’의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구 명예회장의 기술에 대한 믿음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작물을 가꾸는 방식에 따라 열매의 크기와 수확량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과학과 기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이후 교직생활을 할 때도 구 명예회장은 제자들에게 늘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그런 이유로 회장에 재임하던 25년 동안에도 ‘연구개발의 해’, ‘기술선진’, ‘연구개발 체제 강화’, ‘선진 수준 기술개발’ 등 표현은 달라도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기술’을 경영 지표로 내세웠다.

1985년 4월, 금성정밀(현 LG이노텍) 광주공장 준공식에서 공장을 둘러보는 구 명예회장

◆ 민간 기업 최초 중앙연구소 등 70여 개 연구소 설립..기술 수준 도약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대부분의 연구실이 각 공장 별로 소규모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토록 했다. 이 곳에 개발용 컴퓨터,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고주파 용해로 등 첨단 장비를 설치하고 국내외 우수 연구진을 초빙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투자를 했다.

또 제품개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산업 디자인 분야의 육성을 위해 1974년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실을 발족시키고, 일본 등 디자인 선진국에 연수를 지원하는 등 전문가 육성에 힘썼다.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여기에서는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플라스틱 가공산업의 기술고도화를 이끌었다.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 같은 해인 19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하고 이곳에 가혹 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 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시험실을 갖춰 금성사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구 명예회장의 이 같은 연구개발에 대한 신념 뒤에는 우리 기술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산업과 기업의 수준을 한층 선진화해야겠다는 비장한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생산기업을 시작하면서 항상 마음에 품어온 생각은 우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며 “첨단 산업 분야에서 제품 국산화를 통해 산업 고도화를 선도할 것이고 부단한 연구개발을 통해 기업 활동의 질적인 선진화를 추구해 나갈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 연구개발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수 인재 유치와 육성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 1980년대 말 대덕연구단지에 LG화학 종합기술연구원 설립을 추진할 당시 구 명예회장은 프로젝트 출범 초기부터 우수 기술인재 유치를 위한 통 큰 투자를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연구 개발 조직에도 끊임없이 동기와 의욕을 북돋아주는 일에 늘 적극적이었다. 그는 연구소에 관한 한, 우수 인력을 어느 곳보다 우선해서 선발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임원의 정원도 제한하지 않았다. 또한 연구소를 지원하거나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한 예산이라면 우선적으로 승인해 주었다.

또 1982년에는 그룹 ‘연구개발상’을 제정해 연구원들의 의욕을 북돋우고,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구 명예회장의 인재 사랑은 오늘날 LG가 R&D 인재를 중시하는 기업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기술 연구개발에 대한 열정과 인재에 대한 사랑에 남달랐었기 때문이었는지,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석 달여 앞둔 1994년 11월, 나흘에 걸쳐 전국 각지에 위치한 LG그룹 소속의 연구소 19개소를 일일이 찾아 둘러 보았고, 훗날 그때 심정을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오른쪽 세번째)이 미국 현지생산법인(GSAI)에서 생산된 제1호 컬러TV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1999년 10월 LG화학 여수공장을 방문해 시설현황을 살피고 있는 구 명예회장.
틈나는 대로 생산현장을 살피고 연구소를 들러 임직원을 격려하는 구자경 회장.
1999년 4월 LG디스플레이 구미공장을 방문한 구 명예회장.

◆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에어컨 등 국내 최초제품 잇달아 출시..화학·전자 산업 성장 주도

구자경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내 최고의 가전 회사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당시를 회상하며 구 명예회장은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2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19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컬러TV 생산은 1975년 구미 공단에 연산 50만 대의 대단위 TV 생산 공장이 준공되면서 본격화됐다. 구미 공장의 준공은 한국 전자 공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우리나라 전자 공업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컬러TV는 국내의 컬러 방송 시기가 미정이라 국내 시판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글로벌 기술 흐름에 뒤쳐지지 않고 해외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전량을 미국 수출용으로 먼저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이후 우리나라 수출에서 가전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확대됐다.

구 명예회장은 구미 공장을 비롯해 현재 LG의 국내 주요 생산거점이 되고 있는 전자 및 화학 분야의 수많은 공장을 건설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1975년 금성사 구미 TV생산공장에 이어 1976년에는 냉장고, 공조기, 세탁기, 엘리베이터, 컴프레서 등의 생산시설이 포함된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건립했다.

1983년부터 1986년 말까지는 미래 첨단기술시대에 대비해 컴퓨터,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구축하며 오늘날 전자 산업 강국의 기틀을 닦았다.

화학분야에서는 1970년대 울산에 하이타이(가루비누), 화장비누, PVC(폴리염화비닐)파이프, DOP(프탈산디옥틸), 솔비톨 등 8개의 공장을 잇달아 건설하면서부터 종합 화학회사로의 발돋움을 본격화했다.

또 전남 여천 석유화학단지에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PVC레진, ABS(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 납사(나프타) 분해공장 등을 구축해 정유(당시 호남정유)부터 석유화학 기초유분 및 합성수지까지 석유화학 분야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럭키 여천공장 가동은 1970년대까지 가공산업 위주였던 국내 화학산업을 석유화학 원료산업으로 전환하는 이정표로, 원료의 안정적인 수급이 중요한 석유화학 산업에서 수입에 의존하던 원료를 직접 생산하게 됨으로써 석유화학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늘어나는 제품 수요에 대응하고 전국적 제품 공급을 원활이 하기 위해 한반도의 중간지점인 충북 청주에 치약, 칫솔, 모노륨, 액체세제 등을 생산하는 생활용품 종합공장인 럭키 청주공장을 건설했다.

또 부친인 구인회 창업회장이 1954년 완전히 철수했던 화장품 사업으로의 재 진출을 결정하고, 청주공장에 국내 최대 규모의 화장품 공장을 건설해 창업 당시의 사업영역이던 화장품 사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한국종합화학의 나주 공장을 인수해 국제규모의 종합화학으로 커나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수 당시의 시설을 몇 차례 개조하고 증설하여 옥탄올, 이소부탄올, 아크릴레이트 등 석유화학제품의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 21세기 선진 기업경영의 길을 개척..‘혁신 전도사’

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선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실천에 옮긴 재계의 혁신가였다.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기업을 공개해 기업을 자본 시장으로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고,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을 설립해 세계화를 주도하는 등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질적인 성장 사례를 끊임없이 제시해 왔다.

특히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는 다가올 21세기를 주도할 수 있는 기업체질을 갖추기 위한 경영혁신 활동을 열성적으로 전개했다. 계열사 사장들이 ‘자율과 책임경영’을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는 LG의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싹 틔웠고 또 물건을 만들면 팔리는 시절이었음에도 ‘고객 중심 경영’을 표방했다.

아예 회사의 경영이념을 고객가치 중심으로 재정립하는 등 구 명예회장의 혁신적인 경영 활동은 재계의 큰 반향을 일으키며 국내 기업들에게 경영활동 선진화를 위한 좋은 표상이 됐다.

구 명예회장의 ‘자율과 책임경영’이라는 혁신적인 경영체제 도입과 이를 정착시키고자 쏟아 부은 열정은 LG에서 전문경영인 경영 방식이 조기에 정착되고, 나아가 훗날 LG가 국내 대기업 최초로 순수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해 선진화된 지배구조와 투명경영의 근간을 마련하는 데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과감한 ‘혁신’은 구 명예회장에게 하루도 놓칠 수 없는 경영 화두였고, 경영의 실체였다. 회장직에서 내려오며 남긴 이임사에서도 “혁신은 영원한 진행형의 과제이며 내 평생의 숙원”이라고 강조했고 은퇴 후에도 경영혁신 활동을 재임 중 가장 큰 보람으로 꼽으며 스스로 ‘혁신의 전도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1970년 11월, 구 명예회장(테이블 앞줄 오른쪽)이 독일, 일본 등 3개국 4개 회사가 제휴한‘통신 전기기기 제조판매 수출사업을 위한 합작투자 기본계약'을 체결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1970년 민간기업 최초 락희화학 기업공개...모범적인 합작경영

구자경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따른 기업공개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임원들은 기업공개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구 명예회장은 기업공개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꺾지 않았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곧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기업공개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구 명예회장은 다른 기업들보다 한 발 앞서 우리나라 기업의 활동 지평을 세계로 확장시켜 재임하는 동안에만 50여 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했다.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주(州)의 헌츠빌에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설립된 해외 생산기지였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해외 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습득할 수 있었고, LG는 세계의 중앙으로 활동 무대를 과감하게 확장시켰다.

구 명예회장은 서로에게 합당한 원칙을 정하고, 투명한 경영을 통해 상호 신뢰를 얻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신념으로 많은 합작법인을 운영하면서도 파트너와의 분쟁이 없이 합작사업의 국제적 모범을 보였다.

대표적인 합작 사례로는 1966년부터 시작된 호남정유와 미국 칼텍스 사와의 합작을 꼽을 수 있다. 50대 50의 대등한 비율로 경영을 양분했음에도 상생과 조화라는 합작의 기본을 존중하고,원칙을 공정하게 지키면서 한치의 잡음 없이 합작경영을 이어왔다.

1974년 금성통신이 지멘스와의 합작 후 국내 최초로 기업공개를 했을 때에는 합작사업의 모범 사례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이처럼 럭키그룹이 합작 사업의 좋은 선례를 남기면서 당시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 많은 외국기업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럭키그룹에 사전 자문을 구하러 오기도 했다.

1988년 11월, LG 인재육성의 요람인‘인화원' 개원 기념촬영.
구 명예회장(가운데)이 연암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내를 산책하고 있다.
연암대 한 켠에 마련된 조립식 건물 내의 작은 사무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이 정도면 과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 인재육성에 깊은 관심… LG 인재 육성의 요람 '인화원','연암학원' 설립

구 명예회장은 평생을 두고 인재 확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정성을 다해 인재를 육성해 나갔다.

‘그 시대에 필요한 능력과 사명감으로 꽉 찬 사람’이 인재라 여긴 구 명예회장은 이러한 인재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스스로 성장하며 변신하고 육성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구 명예회장은 완성된 작은 그릇보다는 가꾸어 크게 키울 수 있는 미완의 대기(大器)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즉 인재를 선발하는 것도 잘 해야겠지만, 그보다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 제도에 무게를 두어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에 구 명예회장이 그룹의 영속적 발전을 위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실천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재 양성기관인 ‘LG인화원’의 설립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인화원을 건립하면서 ‘기업의 백년대계를 다지는 가장 확실한 투자’라는 표현으로 그룹 차원의 관심과 협력을 당부키도 했다.

1988년 인화원 개원식에서 구 명예회장은 “기업은 인재의 힘으로 경쟁하고 인재와 함께 성장한다. 기업의 궁극적 목표인 인류의 번영과 복지도 인재의 빛나는 창의와 부단한 노력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재 육성은 기업의 기본 사명이자 전략이요 사회적 책임이다”라며 인화를 바탕으로 한 인재 육성의 의지를 천명했다.

구 명예회장은 또 1973년에는 학교법인인 LG연암학원을 설립하고, 낙후된 농촌의 발전을 이끌 인재 양성을 취지로 1974년 천안에 연암대학교를 설립했다. 1984년에는 우수한 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경남 진주에 연암공업대학을 설립했다. 특히 두 대학이 소수정예 특성화 대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설립초기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건축가 고 김수근씨가 설계했던 자신의 서울 종로구 원서동 사저를 기증해, 1996년에 모든 문헌 자료를 디지털화한 국내 최초의 전자도서관인 LG상남도서관을 개관했다. 2006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세계최초로 유비쿼터스 기술을 활용한 음성도서 서비스인 ‘책 읽어주는 도서관’을 구축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 사업을 체계적으로 펴고자 ‘LG복지재단’을 설립해 지방자치단체에 사회복지관과 어린이집을 건립해 기증하고, 저신장 아동에 성장호르몬제 지원, 독거노인에 생필품 지원 등 사회 곳곳의 소외이웃을 돕는 복지사업을 펼쳤다.

또 LG연암문화재단 이사장으로서 문화예술의 창작과 교류를 통한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기치 아래 2000년 LG아트센터를 건립해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데에도 힘썼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 명예회장(왼쪽)이 구본무 회장에게 LG 깃발을 전달하는 모습.

◆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재계의 귀감

구자경 명예회장은 재계의 큰 어른으로도 존경을 받았다.

LG를 이끈 경영인으로서 보여준 성과뿐만 아니라 재계에서는 처음으로 스스로 회장직을 후진에게 물려주어 대한민국 기업사에 성숙한 후계 승계의 모범 사례를 제시했다.

또 인재양성을 위한 사회 공익활동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은퇴 후에는 자연을 벗삼아 간소한 여생을 보내며 귀감이 됐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으로서 25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닌 시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당시 WTO체제의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이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젊은 경영인들이 소신 있게 경영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동반퇴진’을 단행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됐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퇴임 후 2000년대 들어 3대 57년간 이어온 구·허 양가의 동업도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했다.

57년간 사소한 불협화음 하나 없이 일궈온 구씨, 허씨 양가의 동업관계는 재계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사업매각이나 합작, 국내 대기업 최초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등 모든 위기 극복과 그룹 차원의 주요 경영 사안은 양가 합의를 통해 잡음 없이 이뤄졌다.

양가는 기업의 57년의 관계를 아름답게 매듭짓는 LG와 GS그룹의 계열분리 과정 또한 합리적이고 순조롭게 진행했다. 구 명예회장 직계가족은 전자, 화학, 통신 및 서비스 부문으 맡아 LG그룹으로 남기기로 했다. 허씨 집안은 GS그룹을 설립해 정유와 유통, 홈쇼핑, 건설 분야를 맡기로 했다. 또 전선과 산전, 동제련 등을 묶어 구태회, 구평회, 구두회 창업고문이 LS그룹을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왼쪽)과 고 구본무 회장(오른쪽)이 담소하고 있는 모습.

◆ 소탈했던 구자경

구자경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철저하게 평범한 자연인으로서 살았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인회 창업회장이 생전에 강조한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말에 따라 은퇴한 이상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주는 것이었고, 어려울 때일수록 그 결심을 철저히 지켰다.

대신 그는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면서 은퇴 이후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의 취미 생활은 교직 생활 때부터 손을 댄 나무가꾸기로 시작해 난, 버섯 연구까지 자연과 벗삼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는 무엇을 하나 시작해도 단순히 여가로 그치지 않고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출 때까지 파고들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 구본무 3대 회장에 엄격한 경영 수업

구자경 명예회장의 가치관과 경험은 장남인 고 구본무 회장이 2018년 5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할 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구본무 회장은 회장 취임 전까지 20여년간 실무경험을 쌓았는데, 이는 구자경 명예회장이 본인 스스로도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20년간 현장에서 경영인으로 혹독한 훈련을 받은데다, 평소 “아무리 가족이라도 실무경험을 쌓아서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않는다면 승진도 할 수 없고 중책도 맡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당시 기업의 회장직 승계자는 임원급으로 회사에 발을 디뎌 경영수업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고 구본무 회장은 회사의 가장 기초조직인 과장 책임자부터 단계적으로 실무를 수행함으로써 다양한 경영실무와 경영자적 리더십 및 안목을 쌓아갔다.

구 명예회장의 여러 가르침과 교훈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 중 하나는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생활자세였다. 1995년 회장직 승계 당시 구 명예회장은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혁신은 끝이 없다. 자율경영의 기반 위에서 경영혁신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그룹 구성원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합의에 의해 일을 추진하라. 권위주의를 멀리 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이유에서든 약속을 지키고 사치를 금해야 한다는 구 명예회장의 철칙도 그대로 이어졌다. 구 명예회장은 평소 비록 푼돈일지라도 사치나 허세를 위해 낭비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여기고 항상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으면서 이를 실천할 것을 강조해 왔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75세 생일에서 가족사진.
구자경 명예회장.
구자경 명예회장./사진=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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